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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영원한 희망 – 조호성

인터뷰우리들의 영원한 희망 - 조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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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현역 사이클 선수들에게 존경하는 선수나 롤모델을 말해 달라고 하면 두 명에 한 명은 이 사람의 이름을 댄다. 현역선수뿐만 아니라 경기지도자들 사이에서도 가장 성실한 선수, 예의바른 선수, 자기관리가 철저한 선수로 인망이 높다. 바로 조호성이다.
 조호성은 중학교 시절인 1987년 사이클에 입문해 93년 당시 실업팀인 기아자동차에서 엘리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94년 기아자동차로 부임한 정태윤 감독(현 서울시청 감독)을 만나 그해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사이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  
 이후 그는 각종 국제대회와 올림픽의 유망주로 촉망받게 된다. 그런 조호성이 2003년 이듬해 올림픽 시즌을 앞두고 돌연 은퇴선언을 하며 경륜선수로의 길을 선택한다. 5년 후, 놀랍게도 그는 다시 아마추어로 복귀해 또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됐다. 지금 그는 서울사이클링의 플레잉 코치이자 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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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성은 현재 컨티넨털팀인 서울사이클링의 선수이자 코치로 활동 중이다.
사이클 선수 20년. 그 숫자 만킁이나 파란만장할 것 같은 세월이지 않은가. 조호성, 그가 사이클 그리고 인생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호성 선수는 상당히 오랜 선수경력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선수경력을 100자 내외로 정리해본다면?

87년 사이클에 입문, 93년 엘리트선수를 시작해 올해로 20년차다. 2003년 아마추어 은퇴 후 경륜선수로 전향했다가 2008년 아마추어로 다시 복귀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선수생활 동안 3번의 올림픽과 5번의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다.

사이클인생의 전환점을 찾는다면 언제인가?

93년 실업팀인 기아자동차에서 엘리트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이듬해 기아자동차로 정태윤(현 서울사이클링 감독) 감독님이 부임했는데 그 때가 내 사이클 인생의 전환점이다. 정 감독님은 우물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나를 우물 밖으로 꺼내준 사람이다. 그의 지도 덕분에 이듬해(1994년) 일본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40㎞ 포인트)을 목에 걸 수 있었다. 이후 금메달리스트로서 군면제를 받았고 더욱 사이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맞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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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성은 자신의 사이클 인생의 첫 전환점을 정태윤 감독(좌)과의 만남이라고 회고한다.

첫 올림픽 출전이 1996년 아틀란타올림픽으로 안다. 지금 당시를 회고해 보면 어떤가?

포인트 경기에서 7위를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첫 올림픽 출전치고는 나쁜 성적이 아니었다. 사실 성적을 떠나 어린 나이였고 선망하던 프로선수들과 한 무대에서 경기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는 일이었다. 당시 함께 경기를 했던 선수들은 대부분 은퇴해서 사이클경기 해설자나 선수지도자가 됐지만 말이다.
당시 이탈리아 선수였던 실비오 마르티넬로(Silvio Martinello)가 금메달을 땄는데 지금은 잊혀진 프로팀 세코(Saeco)와 폴티(Polti) 팀에서 로드레이서로도 활약했었다. 나와 연배가 비슷했던 동메달리스트 스튜어트 오그래디(Stuart O’Grady)는 아직도 프로팀인 오리카-그린엣지에서 현역선수로 활동 중이다. 

아틀란타올림픽이 조호성에게 남겨준 건 무엇인가?

노력하면 우리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 내가 처음 국제대회에 출전한 것이 1993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였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사이클은 사이클링의 변방이었다. 국제대회에는 큰 기대 없이 출전한 적도 많다. 
그런데 아틀란타올림픽 이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우리도 중심에 설 수 있겠구나’하는 희망, 그리고 자신감이 생겼다. 아시아에 머물고 있던 내 시야가 세계무대로 넓어지는 계기였다. 
올림픽에서 얻은 자신감 때문인지 더 높은 강도의 훈련도 소화할 수 있었고 아시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은 심적으로 조금 더 여유롭게 경기에 임할 수 있게 됐다.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는 단체추발에서 금메달, 포인트경기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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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전성기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데·····. 농담입니다. 아무래도 1999년에서 시드니올림픽이 열린 2000년이 전성기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이클 선수생활을 통틀어 전성기를 꼽으라면 언제인가?

1999년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전까지 프랑스를 근거지로 유럽 사이클링을 체득하기 위한 유학을 했다. 첫 해인 99년에는 7월부터 9월까지 체류했는데 유럽 사이클문화에 충격을 받았다. 특히 선수들의 훈련방식이 너무나 달랐는데 우리나라는 누군가 억지로 시켜서 훈련하는 방식이라면 유럽은 선수 스스로 알아서 자유롭게 훈련하는 문화다.
그런데 프랑스 체류를 시작하고 처음 한 달 동안 내내 비가 왔다. 개인훈련이 낯선데다가 한 달 동안 4일을 빼고 비를 맞으며 훈련했더니 우울증 초기증세까지 보였다. 너무 외롭고 지쳐서 연맹에 전화로 은퇴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다. 당시 정태윤 감독님이 전무이사로 계셨는데 10월 전국체전과 그 해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까지 마치고 생각해보자고 나를 다독였다.
그해 전국체전 2관왕, 월드컵시리즈 종합우승,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포인트경기에서 동메달까지 땄다. 그 후 세계정상급선수들과 어께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고 해외경기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졌다. 은퇴하겠다고 떼쓰고 불평하던 그 때가 돌이켜보면 내 전성기였다. 

이듬해 시드니올림픽을 출전한 걸로 안다. 당시 이야기를 해보자.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석 달 앞두고 월드컵에서 포인트경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워낙 월등한 성적으로 우승하다 보니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리고 올림픽이 가까워 올수록 자신감을 넘어서 자만심으로 변했던 것 같다. 올림픽경기 하루 전, 아직 경기도 치르지 않았는데 우승 세러머니를 어떻게 할까, 어떤 인터뷰를 할지 설레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으니 경기 때 정상적인 컨디션일리 있겠는가. 웜업부터 몸이 무거웠다. 당시 올림픽 포인트경기(현재는 올림픽종목이 아님)는 250m 트랙 160주회를 타야하는데 80바퀴도 달리지 않아서 자전거에서 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밖에 남지 않았는데 매 바퀴 정태윤 감독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몇 초 안 되는 시간동안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호주를 떠돌며 올림픽을 준비하고 동고동락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태윤 감독님 얼굴을 보며 온 힘을 다해 마지막 스프린트 직전까지 3위를 유지했다. 그런데 결승 스프린트 후에 순위가 4위로 바뀌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감독님을 볼 낯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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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는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이 들었던 것 같아요” 

올림픽 4위, 상당히 자랑스러운 성적인데 눈물을 흘릴 만큼 실망이 컸었나?  

내 스스로에게 실망한 것도 컸지만 당시 올림픽메달을 기대하며 한국에서 찾아온 사이클 관계자들의 눈총을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해 은퇴한 홍콩의 왕 캄포 선수가 당시에 11위를 했는데 본인 입으로 내게 이렇게 말했다. “홍콩현지 11개 채널에서 생중계를 했고 20여명의 기자가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홍콩으로 돌아가면 포상을 받을 거다. 나 이제부터 쇼핑 가는데······. 넌 한국으로 돌아가니?”
만감이 교차했다. 그 때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거의 매국노를 바라보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누군가 이런 말까지 했다. “그 동안 너에게 투자한 것이 얼만데 이 정도 성적밖에 못 내니.” 그 말을 들으니 자책감이 비참함으로 변했다. 외국으로의 귀화도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올림픽에서 돌아와 한 동안 자전거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인생을 통틀어 폐인의 삶을 살았던 시기가 그 때였을 것이다. 어딘지도 모를 곳으로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니며 잠들기 전까지 손에 술병이 들려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물 보다 술을 먼저 찾았다. 
올림픽이 끝나고 한 달도 안 되어 전국체전이었는데 그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사흘정도 몸을 푼 후에 경기에 출전했는데 전국체전을 마치고서야 ‘그래도 내가 제일 잘 하는 것이 사이클이구나. 다시 시작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 이후 2002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며 마음을 다잡은 건가?

1997년 외환위기와 함께 기아자동차 팀이 해체되고 2년간 충남체육회 선수로 지내며 올림픽을 준비했던 건데 2001년 시큐어넷 팀이 창단되며 다시 실업팀 소속이 됐다. 시큐어넷 팀도 정태윤 감독님이 지도를 맡으셨는데 여름 훈련캠프를 프랑스에 만들고 훈련했다. 아마 국내에 있었다면 마음잡는 데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해외에 있으면서 사람들 신경 안 쓰고 사이클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감독님의 배려였던 것 같다. 덕분에 2002 아시안게임까지 국제대회에 좋은 성적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다.
난 유독 아시안게임에 징크스가 있다. 선수생활 동안 5번 아시안게임에 출전했는데 낙차나 펑크 등을 유난히 많이 겪는다. 부산아시안게임에서도 징크스가 발동했지만 한국에서 열린 대회였고 2년간 감독님의 지도덕분에 잘 극복할 수 있었다. 부산아시안게임은 메디슨과 포인트경기에서 2관왕을 했는데 지금까지 출전한 아시안게임 중에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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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를 근거지로 유럽무대에서 활동하던 당시의 조호성. 그는 당시 느꼈던 유럽의 사이클문화가 사이클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두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고 회상했다. 

2002년 부인과 연애 중이었던 걸로 안다. 연애담이 남다르던데 본인의 결혼성공기를 공개해 달라. 

아내는 친구 동생에게 소개 받았다. 그러니까 친구 동생 친구. 처음부터 만난 건 아니고 난 합숙생활로 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처음 한 달 동안은 전화통화만 했다.
지금도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한다. 합숙을 마치고 5월 2일이었다. 선배들이 지나는 말로 그러지 않나. 인연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나도 그 말이 어떤 걸 말하는지 그 때 알았다. 정말 ‘한 눈에 저 사람이 내 사람이구나’하는 마음이었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2관왕이 되면서 벨로드롬에서 공개구혼을 했다. 그런데 당장이라도 결혼하고 싶은 내 마음과 달리 뮤지컬 배우였던 아내는 프랑스 유학준비 중이었다. 결국 우리는 훗날을 기약하며 원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말이 원거리 연애지 인터넷이 발달한 시기도 아니었고 전화통화가 고작이었다.  
매일 밤 9시 뉴스시간이 되면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시간으로 밤 9시면 프랑스에서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인 오후 2시 정도다. 그렇게 6개월 정도 전화를 했는데 어쩌다가 한 번 전화를 못 하면 짜증을 내더라. 낯선 외국생활이 힘들고 외롭기 때문에 하루 한 번 듣는 내 목소리에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그래도 힘들게 간 유학이라 들어오라는 말을 못했다. 그러다 유학 중에 한국에 한 번 들어온 적이 있는데 그 때 다시 한 번 프로포즈를 했고 아내의 마음을 얻어 결혼에 골인했다. 

조호성은 어떤 남편이고 어떤 아빠인가?

이제 결혼 10년 차인데 죄인이다. 합숙생활을 하다가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가고 아내나 아이들 옆에 있을 시간이 충분치 않다. 결혼하고서는 돈만 벌어다 주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참 부족한 남편이고 아빠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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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이 사이클선수를 하겠다고 하면 저는 한 번 더 설득할 겁니다. 제가 너무 잘 아는 스포츠기 때문에 아이들의 훈련이나 선수생활에 간섭할 것 같거든요. 그런 걸로 아이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장차 자녀들 중 사이클 선수를 해보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나?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선수나 경기라는 개념은 없다. 그저 놀이로서 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걸 좋아해서 함께 놀아주는 정도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직업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나도 내 아이들에게 굳이 사이클선수를 시키고 싶지 않다. 스스로 다른 스포츠를 하겠다고 하면 존중할 의향은 있는데 사이클을 한다고 하면 한 번 더 설득할 것 같다. 내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스포츠라 혹시라도 선수활동을 할 때 관여하거나 잔소리를 해서 아이들과 거리가 멀어질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2003년 은퇴선언을 하고 이듬해 경륜선수로 전향했는데 2004년은 올림픽이 있던 해였고, 너무 이른 은퇴 아니었나?

이전에도 경륜으로 전향한 진짜 이유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 때 나는 올림픽에만 전념하다보니 지쳤던 것 같다. 올림픽, 아시안게임이 아니더라도 나를 알릴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에게 올림픽 금메달만 바라보는 세상과 감정의 골이 깊었다. 내 탓, 네 탓 따지지 않고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분야를 찾고 싶었다.
2004년 경륜 데뷔를 하고 올림픽이 개막하자 올림픽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올림픽기간 내내 TV를 한 번도 켜지 않았다. 

아마추어 시절 포인트나 추발경기 같은 중장거리 종목이 주특기였는데 경륜은 단거리 종목이지 않나. 전향하고도 힘들었을 것 같다.

경륜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으며 매일이 실패였다. 심지어는 훈련원 첫 테스트에서는 예선탈락의 고배도 마셨다. 그 때까지 내 사이클 인생 처음 있는 예선탈락이었다(웃음). 도저히 방법을 찾기 힘들어서 함께 경륜훈련원에 입소한 후배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그랬더니 그 녀석 왈 “형! 형을 우상으로 알고 사이클 시작한 나한테 부담스럽게 왜 이런 걸 물어요.”하더라. 그래도 자존심이나 체면 차릴 때가 아니었다. 경륜은 정말 생계가 아닌가. 
후배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조언을 들으면서 체중을 불렸다. (웃음)체질을 바꾸기 위해 6개월 간 하루 일과를 프로틴(단백질 분말)으로 시작해서 프로틴으로 마무리했다. 기상과 취침 전을 포함해 훈련과 훈련 사이에 프로틴을 섭취했다. 하루 총 7차례 먹으면서 훈련이 끝난 저녁에는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니 훈련원 입소 때 체중이 69㎏이었는데 퇴소할 때는 87㎏까지 몸무게가 늘어났다. 그렇게 몸을 바꾸니 페달링에 힘이 실리고 주법이 달라지더라.

경륜선수 생활동안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아무래도 관중들이 돈을 거는 사행성 오락이다 보니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크다.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스포츠를 통틀어도 경륜처럼 1등을 해도 욕을 먹는 스포츠는 없을 거다.
베팅 형식상 1등 외에도 2, 3등까지 함께 맞춰야 하는 방식도 있어서 나 혼자 잘 해도 관중들에게 욕을 먹기 십상이다. 경륜선수를 하며 경륜 홈페이지 자유게시판 댓글들 종종 보곤 했는데 그 걸 보면 ‘세상에 이런 욕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한 욕설들이 올라온다. 
게다가 일반인들에게는 경륜이 사행성 사업으로만 보이니 경륜선수들은 손가락질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그렇게 잘 나가는 경륜선수였다가 2008년 갑자기 아마추어 사이클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세간에서는 복귀했어도 적응이 힘들 것이라는 말이 많았다.

경륜 데뷔를 했을 때도 비슷한 말들을 많이 들었다. 심지어는 아마추어로 돌아왔을 때 “나이도 많은데 후배들 앞길 막을 일 있나”하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경륜으로 갔을 때나 아마추어로 돌아왔을 때 모두 그 말들을 채찍질 삼아 더 노력하려고 했다. 지금은 오히려 독이 약이 됐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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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에서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서 아마추어 사이클로 돌아올 때는 큰 고민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결정했었죠.”  

아마추어 사이클로 돌아 올 때 별 다른 고민이나 갈등은 없었나?

아마추어로 돌아 올 때는 큰 고민 없이 돌아올 수 있었다. 경륜에서 해보고 누릴 것은 모두 해봤다는 생각이었다. 더구나 스트레스가 심해 탈모도 생기고 꿈을 꿔도 쫓기는 꿈만 꿨다. 1년 정도 혼자 생각만 하다가 2008년 그랑프리경기 한 달 앞두고 아내에게 상의를 했다. 고맙게도 아내가 도전해보라고 말해줘서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오히려 걱정인 것은 돌아간다고 해도 받아 줄 팀이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남들 같으면 선수 은퇴한다고 할 시점인데······. 저녁식사를 빙자해서 정태윤 감독님께 상의를 드렸더니 흔쾌히 받아 주셔서 감사했다. 덕분에 경륜으로 전향했을 때보다 큰 잡음 없이 안착할 수 있었다.  

아마추어에 돌아와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이었나?

(웃음) 아무래도 체중 감량······. 아마추어로 복귀만 했지 로드레이스나 중장거리에 적합한 몸으로 되돌려야 하는데 말처럼 쉽지 않았다. 경륜선수 생활 전까지 어린 선수로 여겼던 장선재, 박성백 등이 우리나라 사이클을 이끌어가는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보니까 내가 쫓아가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마치 세계무대에 처음 도전했을 때 느꼈던 중압감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니 마음이 급해지더라.
무리해서 한 달 만에 17㎏을 감량했는데 밤에 잠에서 깨어 화장실에 가다가 기절한 적도 몇 번 있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는 것이 체중감량도 힘들고 운동강도도 높으니 ‘괜히 아마추어에 복귀했나’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웃음). 
경제적인 여건도 경륜선수 때와는 달라져서 그런 마음을 더 부추기기도 했다. 아내도 아마추어 복귀할 때는 “응원할 테니 당신 꿈, 멋지게 펼쳐봐”했지만 살림살이를 꾸리며 앞이 캄캄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고 최근에는 말하더라.  

올림픽 출전을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아마추어 복귀를 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이다. 올림픽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았고 과거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기고 꿈을 접는다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경륜 때처럼 또 다른 모험이고 도전이기도 했다. 막상 복귀해서보니 후배 선수들의 기량도 출중했고 국가대표선발전을 잘 통과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하기도 했다.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낙차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주종목이던 포인트경기라서 안타까움이 더 컸던 것 같다.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복귀한지 만 2년도 되지 않았고 경쟁선수들을 모두 파악할 시간이 부족했다. 더구나 5년 동안 자전거 기재의 변화도 컸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을 한다고 했는데 경쟁선수도 파악하지 못하고 내가 사용하는 장비에도 능숙하지 못하니 돌발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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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을 앞두고 월드컵에서 두 차례 2위, 세계선수권에서 6위까지 했기 때문에 런던올림픽에서 어느 정도 메달을 기대했었죠. 그런데 올림픽은 아무리 마음가짐을 정숙하게 먹고 준비를 철저히 해도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더군요.”
 

런던올림픽을 준비하며 스위스에 오래 체류한 것으로 안다. 어떤 생활을 했나?

 과거 정태윤 감독님을 만난 것이 첫 전환점이었고 이후 프랑스에서 유럽 자전거문화를 접한 것이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면 스위스에서의 생활은 내 사이클 인생에 제3의 전환점이었다. 
앞으로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할 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현지에서의 어려움이 있었다면 최소한의 공간만 제공되는 기숙사에서 어린 선수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점이었다. 사실 내가 그 선수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도 상대방에서 부담스러워 하니까 다가가기 힘들었다. 대부분 19~20세 정도의 선수들인데 처음에는 스스럼없이 대하다가도 대회 출전 시 선수등록을 할 때나 대화중에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슬그머니 어울리는 것을 피하더라. 
사실 사교적인 생활이나 훈련이 힘든 것은 큰 상관이 없는데 한국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 곁에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것이 가장 미안하고 힘들었다.

대중에게 다소 생소한 옴니엄이라는 종목으로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옴니엄과 런던올림픽에서의 일화도 이야기해 달라. 

옴니엄은 여섯 가지 트랙종목(플라잉랩, 포인트경기, 제외경기, 개인추발, 스크래치, 독주)을 이틀 간 겨루는 사이클 트랙경기의 꽃이다. 단거리와 중장거리, 순위경기와 기록경기가 공존하기 때문에 어떤 한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경기를 풀어가는 것이 관건이다. 옴니엄의 이런 특징 때문에 어느 한 능력에 특화된 경기보다 내게 경쟁력이 있다고 봤다.
처음 옴니엄 경기를 치렀을 때 첫 날 3종목을 마치고 ‘과연 내일 또 3종목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무척 힘들었다. 그런데 차츰 적응이 되면서 힘들면 힘든 대로 그 상황을 즐기게 되더라.   
올림픽을 앞두고 출전한 월드컵시리즈에서 두 차례 2위, 세계선수권에서 6위에 올랐었기 때문에 나도 그랬고 주변에서도 올림픽에서 동메달은 낙관했었다. 그래도 예전 시드니올림픽에서 마음가짐을 바로하지 못하고 자만심에 빠져서 경기를 그르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편하게 마음먹고 순리에 따르자는 심정으로 도전했다.
올림픽경기 한 시간 전까지도 기록측정을 하면 최고기록까지도 나왔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봤다. 그런데 첫 종목인 플라잉랩을 타는데 시드니올림픽 때와 같은 느낌이 들더라. 결국 첫 종목부터 12위로 출발하며 기대했던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그 때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제아무리 마음가짐을 정숙하게 먹고 준비를 철저히 해도 쉽게 허락하는 법이 없구나’하고 다시 한 번 느꼈다.

조호성 선수는 이미 여러 번 인천아시안게임을 마지막 목표로 정진한다고 밝힌바 있다. 그럼, 인천아시안게임 후 조호성은 어떤 삶은 살 것인가?

지금도 서울시청과 정태윤 감독님의 배려로 팀에서 플레잉 코치를 하고 있지만 인천아시안게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선수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다. 지금부터 2년간은 그 준비기간으로 본다. 

예비 선수지도자로서 우리나라 사이클이 세계무대에서 어느 정도 위치라고 생각하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을 정도면 그들과 기량을 겨룰 수 있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경험과 자신감이다. 세계선수권에서 여러 차례 우승 한 선수들도 올림픽에서 무너지는 것을 많이 봤다. 나 또한 그런 경험을 했었고 말이다. 우리 선수들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내가 선수지도자가 된다면 우선적으로 그 부분에서 자신감을 심어주는 일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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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선수들은 세계무대에 나서도 손색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 사이클의 수준과 선수들이 세계무대에 내놔도 손색이 없다면 어떤 부분이 부족한 걸까?

장기적인 안목과 계획이 부족하다. 과거에는 사설기업이 운영하고 투자하는 사이클 팀이 많았다. 지금의 국내 실업사이클은 대부분 지자체가 주체다. 물론 지자체와 공기업이 국내 사이클계에 이룬 업적도 많지만 실업사이클의 퇴보는 한국사이클을 지엽적인 곳에 머물게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 기업의 해외법인들은 현지 팀을 지원하거나 대회를 주최하는 일을 많이 한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본사들은 그런 의지를 잊어버렸다. 그러면서 장기적인 계획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도 우리에게서 멀어져 갔다. 
나는 지금도 잠들기 전 혼자 상상하고 계획해 본다. 우리나라 기업에서 사이클 팀을 창설하고 해외에 파견해 그 곳에서 시즌경기를 치르며 활동하는 상상이다. 물론 기업의 홍보활동과도 손발이 맞아야 할 것이다. 10년 정도 그런 환경을 정착시킨다면 올림픽 금메달을 바라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가 있어도 변방에만 있으면 한국사이클의 국제화, 올림픽 금메달은 요원한 소원이 될 것이다.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이런 일련의 활동들은 남녀가 만나서 결혼생활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함께 살 집도 마련해야 하고 살림도 장만해야 해서 많은 비용을 지출할 것이고 당사자들도 성격이 맞지 않아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후에는 결혼 당시의 비용보다 적은 비용으로 살림을 살아가고 저축도 하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갈수록 서로를 이해하고 희생하면서 가족을 일구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이클에 대한 투자는 이와 같아야 한다고 본다.
기업과 팀이, 연맹과 국가대표가, 선수와 지도자가 서로 배려하고 희생하며 함께 계획을 세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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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자전거를 못 타는 고통만 하겠니” – ■인터뷰: 꿈꾸는 사이클리스트 구성은 중에서- 
“2011 투르 드 코리아에서 낙차사고로 손가락 부상을 입고 수술을 했었죠. 수술 다음 날 자전거를 못 타면 미쳐버릴 것 같더군요. 부상 때문에 자전거를 못 타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부상보다는 자전거를 못타는 것이 더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고 힘들게 했어요. 작년에 성은이가 투어 오브 총밍에서 저와 비슷한 부상으로 치료를 할 때 제가 부상 중일 때의 마음을 이야기 해준 기억이 납니다.” 

이미 바이크왓 피플(인터뷰) 코너를 거쳐한 후배들이 많다. 박성백, 구성은, 장선재, 이민혜, 나아름 등 모두 하나같이 인터뷰에서 조호성이라는 이름을 말했다. 후배들의 인망을 얻고 멘토라는 말을 듣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 친구들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기자에게서 처음 듣는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이 많은 선배가 올림픽에 나간답시고 후배들 발목 잡는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선배로서 솔선하고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스스로 자존심에 흠집을 내는 것 같았기에 더 나를 채찍질 했던 것 같다. 모두 나를 위해 그런 것인데 후배들이 좋게 봐주었다니 난 인복도 많은 사람이다. 감사하고 행복하다. 

조호성은 미래에도 올림픽 금메달을 꿈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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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언제까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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