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시청 사이클팀 감독, 김형일

onJul 1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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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표정이 다양하고 목소리가 크다. 그래서 멀리서도 기쁜지, 우울한지 알 수 있고, 다른 이와 나누는 환담이 잘 들린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하고, 마음을 굳히면 누구에게나 당당하다. 존경하는 이에게 겸양하고 자신에겐 인색하며, 하는 일에는 열정적이다. 무엇보다 그는 사이클링을 사랑한다. 대구시청 팀 감독 김형일을 수 년 간 지켜본 자의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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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선수들과 한창 동계훈련에 여념 없는 김형일 감독을 찾아가 대뜸 팀 취재를 하겠다고 했다. 본인의 인터뷰 기사라는 말은 빼고.
 
그와 관련된 일화가 있다. 2009년 초, 그는 심판검정을 마치고 실습출장 중이었다. 
순위경기와 기록경기가 상호 바뀔 때면 잠깐 쉬는 시간이 생기는데, 심판들에게는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포인트 경기를 마친 후 단체추발 경기를 하려면 블루밴드에 일정 간격으로 부뤼레를 놓고, 추발선에는 스타팅블럭을 세팅해야 한다. 반대로 순위경기로 바뀌는 시간이면 세팅한 것을 다시 되돌린다.
남들은 이렇게 경기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그런 모습을 카메라로 촬영하며 지켜보는 또 다른 실습심판이 있었다. 그 때 김형일이 그에게 다가가 따끔하게 한 마디 했다.

“실례합니다.”
“······”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죠.”
“······!”
“다른 심판들은 서로 돕고, 바쁘게 뛰어다니는데 혼자 카메라 갖고 놀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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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감독은 대한자전거연맹 심판이기도 하다. 2014년 광명스피돔에서 열린 트랙 주니어 월드챔피언십에서 김 감독은 국제심판들의 통역을 맡기도 했다.

이것이 대구시청 팀 감독 김형일과 기자의 첫 만남이다.  
1코너와 출발심판보를 맡고 있던 기자는 심판위원회로부터 각 보직 심판업무를 파악해서 매뉴얼로 작성해달라고 별도의 업무를 부탁받았다. 그에겐 한창 원고용 사진을 촬영 중이던 기자가 선배 심판을 돕지 않는 농땡이로 보였던 것이다. 그 때부터 기자의 눈에 그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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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김형일은 당시 대구시체육회 여자사이클팀(현 대구시청) 감독으로 부임했다.

2012년 말, 그는 대구시청 팀 감독으로 임용됐다. 당시 나이 34세. 현역 사이클 감독 중 최연소였다. 서울 토박이가 가족과 떨어져 단신으로 대구에 부임했는데, 숙소도 얻지 않고 만촌 벨로드롬 숙직실에서 1년이나 살았다. 경험이 일천했던 감독은 3년차부턴 실업사이클연맹 최우수 지도자상을 2년 연속 수상했을 만큼 악바리였고, 선수들을 우스갯소리로 그를 사악하다고 놀렸다.

어느 날, 기자는 오후 훈련의 종례를 마친 그에게 찾아가 8년이나 지난 묵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88올림픽 보고 사이클 선수 됐어요

사이클링을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88올림픽이 열렸어요. 우연히 TV에서 올림픽 사이클 경기 중계를 보고나서부터 누군가 “너 꿈이 뭐니”라고 물으면 다른 아이들이 대통령이나 장군이라고 말할 때 전 “사이클 선수가 되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선교하고 싶어요”라고 대답했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부모님은 아들의 그런 말에 감동 받으셨던 것 같아요.
2년이 흘러서 제가 5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께서 무척 진지한 목소리로 장래 꿈을 다시 물어보시더군요. 전 이전과 똑같이 사이클 선수가 되어 선교하겠다고 말씀드렸죠.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괴짜 꼬마의 막연한 이야기였죠. 아버지께서는 아들의 막연한 꿈을 어떻게든 이뤄주고 싶으셨나 봐요. 바로 서울시체육회에 문의를 하시더니, 다음날 당시 중학생 선수들이 타던 자전거를 사주시더군요. 그리고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저를 데리고 송파중학교 감독 선생님을 찾아가셔서 “제 아들이 사이클 선수가 되고 싶다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하고 여쭈시더라고요. 하하.
그 이후 감독 선생님의 배려로 방과 후에 중학교 형들과 함께 특별 수업을 받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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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감독은 초등학교 시절 88올림픽 사이클경기를 보고, 사이클 선수를 꿈꿨다고. 사진 왼쪽은 국군체육부대 복무시절, 오른쪽은 국가대표로 출전한 2002 부산아시안게임.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인 주니어 선수활동을 했군요.
중학교에 진학해서 바로 사이클을 한 건 아니에요. 송파중학교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았지만 중학교는 서울체중으로 진학했거든요. 중학교 입학 후에는 선생님들의 권유로 육상을 먼저 했어요. 어린 마음에 바로 사이클을 타고 싶었지만 2년 가까이 육상부에서 체력훈련만 하다가 2학년 말에서야 정식으로 사이클링을 시작하게 됐죠. 
중학 때 저는 남들보다 재능이 있거나, 열의만큼 실력이 따라주는 선수가 아니었어요. 선생님이나 선배들이 “넌 만날 그 모양이냐”, “자전거를 그렇게 타도 살이 안 빠지냐”고 핀잔을 주곤 했는데요. 그럴 때면 “전 대기만성 형이에요”하고 넉살을 떨곤 했어요.  
웬만한 타박에 주눅 드는 성격도 아니었고······. 다시 생각해보면 막연하지만 언젠가 뛰어난 선수가 되겠다는 꿈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진학 후 단거리 경기에서 특기를 보이기 시작했고요. 경륜과 스프린트가 주 종목이 됐죠. 

경력을 보니까 실업팀 활동 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꾸준히 공부해서 박사학위까지 따셨더군요. 공부 욕심이 많았나봐요. 
고등학교 졸업반 때, 저는 소위, 잘 나가는 실업팀에 입단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부모님께서 “운동선수가 네 인생의 끝이 아니기 때문에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설득하셔서, 한국체육대학교에 입학했죠. 특별히 남들보다 공부 욕심이 많은 건 아니었어요.
학교는 서울체중, 서울체고, 한국체대 그리고 학교는 아니지만 국군체육부대까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셈이죠. 대학에 진학하고도 팀 활동을 했지만, 아무래도 학교이니까 경기력보다는 면학분위기 쪽이 더 발달한 편이었어요. 
신입생 때를 돌이켜보면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것을 즐기고 싶어서 사이클이나, 공부나 그리 열심히 한 것 같지 않아요. 나중에 정신 차려보니 사이클과 공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것 같아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3학년 때는 국가대표에 발탁이 됐고요. 이듬해 2000년 아시아선수권에서 단체스프린트 은메달을 따고, 국군체육부대에 입대해서도 국가대표활동을 할 수 있었죠.
박사과정은 제가 경륜선수를 하던 시절, 훗날 선수자도자를 꿈꾸면서 했던 공부였는데요. "감성적 리더쉽이 실업팀 선수들의 경기력과 성취목표 성향, 선수 만족에 미치는 영향"였어요. 제 입장에서 생활밀착형 공부였는데요. 선수지도자가 된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적이었고, 현실의 벽에 부딪히는 문제가 많은 주제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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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훈련원을 조기 졸업한 김형일은 신인전 경기를 마치고 곧바로 특선급 선수로 활동했다. 

선수시절을 통틀어 본인에게 가장 힘들었던 기억, 그리고 가장 멋진 추억이 있다면요.
상무에 입대하고 2002 부산아시안게임을 위한 대표팀이 꾸려졌는데요. 우리나라도 지금은 단거리 종목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그 때만해도 일본이나 말레이시아보다 성적이 저조했거든요. 그 때문에 거의 1년 내내 합숙을 하며 공들여 준비했습니다.
부산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예선도 2위로 통과하며 좋은 출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4강에서 패해서 3·4위 결정전까지 내려가고 거기서도 패해서 4위에 그치고 말았죠. 동메달만 땄어도 제 인생이 변했을 것만 같고, 한동안 얼마나 쓰리고 아팠는지······, 한 5년간 부산에 가질 못했습니다.
반면 군복무 시절은 아주 화려했던 것 같아요. 대학 팀 선수들은 실업선수보다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적이거든요. 국가대표 활동이 국군체육부대 복무시기가 겹치는데, 실업선수들처럼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였어요. 게다가 당시 상무에 속한 선수들이 돌풍을 일으켰거든요. 전대홍, 장태찬, 김배영, 양희진, 권순종 등 당시 사이클계에서 내로라하는 선수들과 함께 복무를 했어요. 1년에 7개 대회를 출전해서 모두 종합우승을 거뒀을 정도니까요. 정말 화려한 시절이었죠.   

그 이후 경륜선수로 활동한 건가요? 경륜훈련원에도 조기졸업을 했다던데요.
이듬해인 2003년까지 아마추어(엘리트)선수로 활동했고요. 그 해 말에 경륜훈련원에 입소했죠. 제가 경륜 11기인데요. 저희 기수부터 조기 졸업제도가 생겼고, 동기들 중에 스타 선수들도 많았어요. 12명이 한국 경륜사상 첫 조기졸업을 했는데, 졸업성적이 가장 좋은 김배영, 조호성 그리고 제가 실전에 투입되자마자 특선급 선수들이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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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륜선수 시절. 김형일 감독 왼쪽이 현 서울시청 코치 조호성이다.

경륜 선수를 하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데뷔 당시 호성이 형(현 서울시청 코치)이 가장 이슈였고 경륜계의 기대도 컸는데요. 호성이 형은 프로 경륜의 독특함이나 특유의 경기 방식 때문에 한두 달 고생했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크게 주목받지 않던 저는 초반부터 연승을 하면서 급부상했어요. 신인전 직후 인터뷰에서 앞으로의 목표를 묻기에 “20위 내만 유지하겠다”고 말했는데 말이죠. 하하.
제 스스로 기대했던 것보다 큰 성적을 거두다보니 압박감이 심해지더군요. 나중엔 신경증이 생겨서 훈련 중에 환청도 들리고, 잠도 못자고요. 경기를 마치고 오면 사나흘씩 집 밖으로 나가지 않기도 했어요. 결국 훈련을 잘 못하고, 경기 중 과실을 범해서 제재를 받다보니 스스로 욕심을 내려 놨죠. 6개월 간 활동을 접고 혼자 운동만 했어요. 그렇게 마음 다스리기를 한 후, 이듬해가 되서야 다시 재기했지요. 

5년 만에 경륜에서 돌연 은퇴했습니다. 갑자기 은퇴를 결정한 이유가 있나요?
경륜에서 만 5년을 못 채웠어요. 사실 상무에서 제대한 후 바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훗날 선수지도자를 꿈꾸며 선진 사이클링을 직접 체득하고 싶었죠. 그런데 군복무를 마칠 때 쯤, 아버님 사업이 힘들어지면서 가세가 기울었어요. 철모르고 유학을 떠나겠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게 경륜이었습니다. 시작하면서 5년 후 은퇴하여 예정했던 유학을 하고, 선수지도자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죠. 경륜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봐 미리 말씀드리는데요. 경륜선수는 아주 좋은 직업입니다. 선수로서 스트레스가 심하지만 그만큼 높은 수익이 있고요. 경기 이외에는 시간적 여유도 많아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도 늘고 공부하기도 좋죠. 
간혹 ‘왜 그리 빨리 은퇴했냐’는 질문을 받는데요. 달콤했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지고, 수익도 안정적이게 되면서 5년으로 정한 기한이 다가올수록 답답해지더라고요. 어린 딸과 아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더 하면 경제적으로 윤택해질 텐데······. 아이들에게 더 많은 걸 해줄 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오랫동안 경륜선수를 하고 나이 먹어 은퇴한 저를 생각해봤어요. 잘 풀리면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다른 직장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서 ‘우리 아빠는 사이클 선수였어요’라고 말하는 걸 상상하니 용납되지 않더군요. 제가 사랑하는 사이클링이 과거형이 되는 것이 싫었고, 젊음을 담보하는 사이클링보다 미래를 위한 사이클링을 계속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니까. 홀가분하더라고요. 1년간 유학준비를 하고, 2008년 2월 12일 은퇴했습니다. 그리고 그 달 22일 영국으로 출국했죠. 

억대 연봉의 경륜 선수를 뒤로하고 배움의 길을 선택

영국 유학에선 어떤 공부했나요?
결론부터 말하면 원래 계획했던 유학은 실패했습니다. 유학 준비를 할 때, 호주나 영국, 미국을 염두에 뒀는데, 당시엔 영국이 사이클계에서 신흥 강국으로 떠오를 때였어요. 그래서 영국에서 관련 전공을 찾으려고 했었죠. 
출국 전, 대한자전거연맹을 통해서 선수지도자 국제연수(국제스포츠양성사업)에 응모해 일정기간 교육비보조를 받았는데요. 이렇게 발탁된 장학생은 우리 국가대표가 현지 대회에 출전할 때, 코치진으로 투입됩니다. 저도 2008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트랙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현지 코디네이터 역할을 했습니다. 그 때, 코치진으로서 국제경기에 대한 경험도 할 수 있었고, 국가대표 코치진과 연맹관계자들에게서 국내정보도 들을 수 있었지요.
그러다 이듬해 초 잠깐 한국으로 입국할 일이 있었는데, 2009년 국가대표 지도자를 공개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겁니다. 전 합격하리란 생각도 하지 않았고요. 선수지도자 심사를 준비하는 과정도 배움이라고 생각해서 응시했는데, 트레이너로 합격한 거예요. 그래서 다시 출국하려던 것을 취소하고 국가대표 단거리 트레이너로 합류하면서 제 유학은 미완으로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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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사이클연맹이 실시한 개도국 사이클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방글라데시에 파견된 김형일 감독. 

동남아시아 국가에 선수지도자로 파견된 적도 있다던데요.
예, 방글라데시에 파견됐었죠. 제가 합류한 2009년 국가대표는 1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지만 대표팀 내의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해 체육회에 알려지면서 갑작스럽게 해체됐지요. 국가대표에 합류하기 위해 유학도 포기한 제게는 좀 황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어요. 제 잘못도 없이 졸지에 실업자가 된 셈인데, 마침 그 소식을 듣고 아시아사이클연맹 사무처장님이 연락을 주셔서 해외파견 감독을 제안하시더군요.
아시아사이클연맹에서 사이클 후진국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인데, 우리가 UCI 지도자를 초청해 강습을 여는 것과 비슷합니다. 4년에 마다 출전하는 아시안게임이 있잖아요? 그 아시안게임 외에 인도, 방글라데시, 태국, 파키스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만 출전하는 동남아시안게임이 따로 있어요. 그 해 방글라데시가 개최국이었는데 사이클은 선수를 비롯해서 경기 여건이나 장비까지 모두 기초도 없는 실정이었죠. 대회 개최까지는 4개월 밖에 시간이 없는데, 방글라데시 총 감독으로 파견 가서 대회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이었어요.

방글라데시에서 겪은 일화를 좀 말씀해주세요. 
파견을 가서 보니까 코치 4명, 선수 20명이 넘어서 상상하던 것보단 규모도 있고 준비도 많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자전거와 장비를 보니까 우리로서는 생각지도 못 할 것들을 쓰고 있더라고요. 참고로 방글라데시 안에는 경기용 자전거를 다룰 숍이 한 군데도 없어요. 휠셋 하나 장만하려고 해도 말레이시아까지 가야했죠. 자전거는 생활자전거 수준이었고요. 에어로 핸들바가 없어서 스틸 핸들바에 파이프를 용접해서 붙였더라고요. 선수들은 사이클 슈즈를 살 형편이 안 되니 다 떨어진 축구화에 나무판을 클리트처럼 엮어서 신고 있었습니다. 
더 황당한 건 그 초라한 자전거도 몇 대 되지 않아서, 오전반, 오후반으로 남녀 선수가 번갈아가며 훈련해야 했다는 것이죠.
장비가 낡고 보잘 것 없는 건 사실 문제도 아니었어요. 방글라데시가 도심지는 번화해 보여도 사는 모습이 우리나라로 따지면 50년대로 생각하면 쉬워요. 선수촌이라고 해봤자 아무 것도 없는 시골에 벽돌 건물하나 있는 게 다고요. 게다가 90%가 무슬림이니 남자들에게는 좀 관대해도, 여자들은 피부가 노출되면 죄악으로 여겼어요. 
그런데 사이클 유니폼은 입으면 몸매가 다 드러나고, 맨살도 나오잖아요. 여기서 첫 트러블이 생겼지요. 전 단호하게 “운동선수는 달라야한다”며 반팔, 반바지를 입게 했는데, 여자 선수들이 훈련을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엔 “성별을 떠나서 똑같은 인간, 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같은 조건이어야 한다”며 설득했죠.   
더 황당했던 건 선수들 프로필을 받았는데, 모두 19~20살 안팎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20대로 보이지 않는 분이 있는 거예요. 따로 불러서 면담을 해보니 43살이고 장성한 아들이 있는 엄마더라고요. 알고 보니 우리나라처럼 주민등록제도가 정확하지 않은 거예요. 여성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출생신고를 늦게 하는 경우도 있고요. 
그 분은 젊은 친구들만큼 자전거를 잘 타니까 선발된 건데요. 실제 나이로 정정하고 출전했어도 나이제한이 없기 때문에 사실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나이가 많으면 선발되지 않을까봐 실제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고 해요. 선발이 되어야 운동선수로서 지원이 나오고 가족들에게 보탬이 되니까요.
게다가 실제 훈련을 해보니까 전국에서 뽑혔다는 선수들이 자전거를 오래 타지 못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최장거리로 탄 게 10㎞이었다더라고요. 팀카는 사이렌나 스피커 시스템이 없어서 메가폰을 창밖으로 내고 소리 질러야 했고요. 원로 선배님들께나 들을 법한 특이한 경험을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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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파견 중 직면한 부조리에 대해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파견 중 힘든 점은 어떤 것이었나요?
새로 국가대표선발전을 열었는데, 선수를 차에 태워서 다른 선수들을 앞지르는 반칙을 쓰기도 하고요.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서 밀어주기도 하는, 부정이 만연해 있더라고요. 돌이켜보면 나도 참 이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부패를 뿌리째 뽑아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방글라데시 입장에서는 2002년 축구 월드컵을 준비하던 히딩크에게 했던 기대를 저에게 했던 것 같아요. 신문에도 나고 사람들의 관심도 컸지요. 
그 때문에라도 더욱 강경하게 부정을 용납하지 않았겠다고 엄포도 하고, 다짐도 받았죠. 저는 선수들이 제가 파견되기 전보다 실력이 늘고, 지난 훈련, 지난 대회보다 향상된 모습이면 만족하고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4개월짜리 감독이 오랜 세월 지속돼온 부정을 없애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던 거죠. 제 바람이나 교육철학과는 달리 방글라데시 사이클 관계자들을 제가 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기술을 속성으로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메달에 집착했어요. 메달을 따야지만 국가차원에서 사이클경기에 지원도 하고, 벨로드롬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이죠. 
파견 막바지에 동남아시안게임이 열렸고, 남자 팀타임트라이얼 경기였어요. 아시다시피 타임트라이얼 경기에서 팀카는 선수들 후방에서 따라가야 하잖아요. 그런데 정체모를 차가 나타나서 제가 운전하고 있는 팀카를 가로 막더라고요. 그러고는 선수들 앞으로 이동해서 후류를 이용해 선수들을 유도해서 데려가더군요. 너무 화가 나서 경기를 마치고 취재진과 다른 팀 관계자들이 있는 곳에서 그 상황을 폭로했습니다. 제가 책임져야하는 대표 팀이니 총감독으로서 양심선언을 한 거죠. 당연히 메달은 박탈당했고요. 그 때만해도 그게 그 나라에서 그렇게 파장이 클 줄 몰랐어요. 방글라데시 연맹이 발칵 뒤집혔고요. 일부에서는 제 신변을 위협하는 이들도 생겼죠. 그 와중에 방글라데시 연맹 회장께서 제 신념을 지지해주고, 출국 때까지 신변을 보호해주셔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 남은 경기에서는 제가 사실상 배제됐어요. 마지막 날, 여자개인도로에서 방글라데시 선수가 일찍 어택을 했는데, 중간에 모터사이클이 밀어주는 반칙을 쓰더군요. 출전한 모든 선수들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결승선에 들어오니 만여 명이 넘는 관중들이 자국선수가 우승했다고 환호하고 있더라고요. 기자들이 제게 찾아와서 축하한다며, 소감을 묻는데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수들이 그 부정을 고발했고, 부정을 저지른 선수와 코치는 구속되어 감옥살이를 하게 됐어요. 전 사흘 뒤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제겐 좋은 경험과 추억이기도 하지만 홍역 같은 기억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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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감독은 2009년 프로컨티낸털 팀이던 챔피언시스템 팀의 어시스턴스 메니저로 활동했다. 맨 오른쪽이 김형일 감독. PHOTO : champ-sys.com

그 뒤로도 해외 팀에서 활동한 걸로 아는데 어떤 팀이 었지요?
대표 팀 해체를 겪고, 방글라데시 파견 등 생각지 못한 상황이 계속 이어졌죠. 한국에 돌아와서도 정규직을 구하지 못하고 일부 실업팀을 도와주는데 만족해야 했고요.
2010년 투르 드 코리아가 임박했던 때였는데, 지인의 소개로 챔피언시스템 코리아의 백운직 대표님을 알게 됐어요. 그분이 제게 챔피언시스템의 후원 팀인 CKT 팀이 TDK에 출전하는데, 팀 매니저가 오지 못하는 상황이니 도와주겠냐고 하더군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아이슬란드에서 화산(에이야퍄들라이외퀴들)이 분화해서 팀 매니저가 있던 곳의 항공편이 마비되어 한국에 오지 못한 거였죠. 선수들은 대부분이 동유럽인 알바니아에 있어서 영향이 없었고요. 팀에서는 급하게 영어가 되고, 사이클경기에 해박하며, 운전도 잘하는 사람을 알아봐달라고 했나봅니다. 말로는 도와주는 사람이었는데, 팀 감독에서부터 마사지사 역할까지 모두 도맡아야 했습니다. 대회를 마치고서 나중에 그 팀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어요. 다음 시즌에 팀을 프로컨티넨털 팀으로 개편하고 유럽에서 활동할 계획인데, 코치진으로 합류해달라고 하더군요. 해외에서 선수지도자로 경험을 쌓고 싶었던 제게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죠. 그 팀이 2011년 프로컨티넨털 팀으로 등록한 챔피언시스템 팀이었습니다. 

유학은 마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실전으로 배우게 된 셈이네요.
그런 셈이죠. 2011년 초반엔 아시아투어 경기에 출전하다가 5월부터 스위스를 중심으로 유럽투어를 다녔습니다. 에스토니아, 룩셈부르크, 독일, 프랑스 등등 매주가 경기였어요. 1년 정도지만 아주 값진 경험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요. 그해 말 장찬재를 추천해서 2012년 이 팀에 임대선수로 활동했죠.
그런데, 시즌 막바지가 되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 정도 팀이면 코치진의 인력도 더 많아야하는데, 1인 3~4역을 해야 할 실정이었으니까요. 그래도 귀한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참고 견뎠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팀 매니저는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더라고요. 그런 게 더 서럽고 향수에 젖게 만들더군요. 그런 때에 마침 유럽 경기에 참가하러 온 금산군청 최희동 감독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런저런 사정을 들으시더니 한국으로 돌아가서 함께 일하자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2012년엔 금산군청 단거리 코치를 맡았습니다. 

최연소 공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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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독은 팀의 내실만큼이나 외부에 보이는 모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위 사진은 감독으로 부임하고 첫해 촬영한 팀 프로필 사진. 왼쪽부터 은퇴한 손희정, 김수현, 김형일 감독, 구성은, 손은주(현 음성군청). 

대구시청 팀은 어떻게 부임하게 된 거지요?
금산군청에서 1년 정도 코치를 하다가 조금 더 지도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감독님께 완곡하게 말씀을 드리고 사직했을 때입니다. 
당시 대구시체육회 사이클팀은 김재규 감독님이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셔서, 감독직이 공석이었습니다. 지금은 감독도 공개채용이 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지명제, 추천제가 일반적이었어요. 그런데, 대구시체육회에서 사이클 감독을 공개모집한 거예요. 나름의 지도역량을 발휘하고 싶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최종면접까지 갔는데, 심사위원들이 고민이 많았었다고 해요. 
우선 제가 최종까지 갈 수 있었던 이유는 소위 말하는 액면이 좋았기 때문이에요. 경기지도자 1급에 UCI 지도과정도 최고 등급인 레벨 2까지 취득했고, 체육학 박사학위까지 있었지요. 해외 경험이 많은 것도 한 몫 했고요. 반면 안 좋은 점은 제가 34살이었는데 나이는 현직 감독 중에 가장 어렸고, 지역 연고가 없는 서울 토박이에, 그렇다고 선수지도 경력이 긴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여러 가지로 미심쩍은 게 사실이었죠. 그렇게 고심 끝에, 채용방식도 공개로 바꾼 것처럼 채용기준도 그에 맞게 바꿔보자는 취지로 저에게 기회가 주어졌다고 합니다. 2012년 12월 17일, 당시 대구시체육회 여자사이클팀(현 대구시청 사이클팀)으로 부임하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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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의 훈련은 엄격하다. 치밀한 계산 하에 선수 개개인이 자각할 수 있는 성장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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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조례와 종례에서 그 날 훈련에 대해 선수들과 강론한다. 

감독 부임 당시 대구시청 선수가 4명뿐이었는데, 선수가 적어서 팀 운영에 애로사항이 많았겠어요.
지금은 은퇴한 김수현, 손희정 선수, 음성군청으로 이적한 손은주 선수가 있었고, 구성은 선수는 지금도 함께 하고 있지만 제가 감독 부임 후 처음 맞은 시즌인 2013년엔 오리카-AIS에서 활동이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선수 3명으로 1년을 알차게 꾸려야하는 상황이었죠.
애로사항은 선수가 적은 게 아니라, 제가 대한민국 여성 사이클 선수를 처음 지도한다는 거였어요. 훈련에 대한 지식과 팀 운영에 대한 마인드는 있었는데, 훈련기준이나 숙소생활, 팀을 이끄는 분위기, 의사소통까지 여자 선수들을 통솔할 기능이 아예 없었어요. 그러다보니까 선수들도 너무 힘들고, 저는 저대로 힘들고······.
더군다나 부임 초기였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서울에 아직 남아 있던 상태였고, 저는 처음 1년 동안을 대구 만촌사이클경기장 숙직실에서 살았어요. 아침이면 문 열고, 밤이면 문단속하면서요. 와보셔서 알겠지만 만촌경기장 주변이 밤이면 휑하거든요. 엄청 무서워요. 

감독님이 대구시청 팀을 맡고, 바뀐 점이 있다면 어떤 걸까요?
글쎄요. 과거에 우리 팀이 어떻게 운영됐는지는 잘 알지 못 합니다. 다만, 제가 부임하고서 2년차까지는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겪은 것 같아요. 이후 3년차에는 단거리 위주로 팀을 쇄신했어요. 훈련과 경기, 팀 운영에 있어 가능한 범위를 좁히고 집중할 수 있도록 바꾼 것이죠. 그렇게 단거리에 특화 팀으로 운영이 안정화됐고요. 2016년에는 대구시청 팀으로 승격되어 다시 중장거리 선수들까지 갖춘 팀으로 변화됐지요.

소통과 상생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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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청 사이클팀은 SNS로 팀 활동을 홍보하며, 정례적으로 팬들과 함께 하는 행사도 열고 있다. 김 감독은 SNS 활동은 물론 오프라인 행사에도 선수들과 똑같이 동참하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사진은 2014년 팬미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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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라이딩 위드 대구. 몇 년 사이 참가하는 팬들의 수도 부쩍 늘었다.

대구시청 팀은 선수와 감독 모두 SNS 활동이 적극적이고 팬들도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활동이 특별한 건 아닙니다. 제가 전에 몸담았던 금산군청도 팀 활동을 인터넷을 통해 알려왔어요. 인터넷과 SNS를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이 비단 저희가 처음이 아니지요. 다만 요즘은 많은 팀들이 SNS 활동을 하지만, 제가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선수들이 지인들과 소통하는 정도였지, 팀 페이지를 만들고 팀의 훈련과 일상을 지속적으로 전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을 뿐이죠. 팀 SNS 활동은 선수와 감독의 소통에도 도움이 되고요. 선수들에겐 대중의 시선이 미친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무대 위의 배우와 스포츠 선수의 공통점은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1년 쯤 지나서 팬미팅을 개최했는데요. 행사 전에는 ‘한 10명 쯤 나오겠지’ 생각했는데, 팬들이 100명 이상 모여서 당황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라이딩 위드 대구’라는 팬미팅 행사를 연례로 개최하고 있죠.   

스폰서 유치도 적극적인 걸로 알고 있는데, 관련된 일화를 듣고 싶습니다. 
전 스포츠 팀이 사회적으로 파생성 있는 활동을 해야한다고 생각해요. 스폰서십을 통한 스포츠 비즈니스들을 팬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그 일환이죠. 스캇, 크림서울, 윅스인터내셔널, 루고컴퍼니, 비토리아, 카멜백, 액티브라이프, 싱크웨이, 아이스커버, 아미노바이탈이 대구시청 팀의 스폰서들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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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감독은 스폰서십을 ‘상생’이라고 말한다. 본인의 사진 촬영을 1컷 부탁해도 스폰서 로고가 붙어 있는 팀 트레일러 앞에서 촬영해도 되는지 되묻는다. 

스캇의 경우는, 구성은 선수가 오리카에서 활동할 당시, 구성은 선수에게 마케팅 책임자를 소개받아서 제가 팀 후원에 대한 제안을 했습니다. 제안하더라도 기업 입장에서는 계획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곧바로 응낙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렇더라도 시간을 두고서, 지속적으로 연락을 취하고 재차 건의를 해야 하는 법이죠. 스캇은 바로 이듬해인 2014년 저희 팀과 후원협약을 맺었어요. 
크림 서울은 스캇 때문에 후원을 맺게 된 스폰서에요. 스캇이 후원을 결정하고, 유니폼을 만들어야했는데 스캇에는 기성복만 있기 때문에 팀에는 적합하지 않았지요. 맞춤복 업체를 알아보던 중에 스위스 스캇 본사와 관계가 있는 큐오레라는 의류업체가 있다더라고요. 그 브랜드의 한국지사를 알아보니 크림 서울이었고, 마침 자전거 커스텀 의류를 만들더라고요. 그래서 후원제안서를 들고 크림 서울 신진섭 대표를 찾아가 만났는데, “제가 구성은 선수 팬입니다. 저희에게 후원제안을 해줘서 오히려 고맙습니다”하셨어요.
후원사 유치는 시간과 발품을 팔아 정성을 들여야 하고 때론 운도 좋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감독이 채신없이 군다고 힐난할지 모르지만 전 지금보다 더 많은 스폰서십을 맺고 싶고, 제안하고 싶은 브랜드도 많아요. 얼마 전에는 유명한 안마의자 회사에도 제안서를 들고 찾아간 적이 있어요. 물론 그 회사는 난색을 표했고, 저 역시 단번에 응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후원을 받지 못했지만 일단은 그 브랜드와 인연을 맺었잖아요.

스포츠 팀에게 스폰서란 어떤 의미인가요?
윈윈하는 관계, 상생하는 관계라고 생각해요. 스폰서십에 대해 올바르게 눈을 뜨게 된 건, 서울시청 정태윤 감독님의 영향이 큽니다. 누군가는 스폰서십을 ‘예산이 부족한 스포츠 팀이 좋은 장비를 쓰기 위한 수단’으로 정의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런 잘못된 관념을 깨준 것이 정 감독님이셨죠. 후원사와 스포츠 팀 모두 상생할 수 있어야 후원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그 분의 입장이셨어요.
제가 스폰서로 유치하고 싶은 브랜드가 많다고도 했는데, 그 업체에 모두 제안을 하지 않는 이유는요. 선수들 모두가 좋아하고 함께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에요. 
스포츠 팀은 후원제품을 소비자에게 소개하고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하는 역할이어야 하는데, 애정 없는 브랜드와 제품을 어떻게 홍보하고 좋다면서 쓸 수 있겠어요. 
후원사 입장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고 팀 입장에서도 제안이 성립하지 않는 거죠. 하지만 선수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디든 찾아가서 제안서를 내밀 수 있고, 스폰서의 의견을 수용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어요. 반대로 브랜드에서 후원제안이 들어온다고 해도 선수들이 모두 인정하고 좋아하는 브랜드이어야 하겠죠. 

“선수와 감독이 서로 배움이 되는 관계일 때, 서로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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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선생님과 푸근한 동내 오빠의 모습이 공존하는 김 감독.

선수지도자로서 감독님은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저 지도하는 성향만 말하면 상당히 섬세하고, 예민해요.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그 자체에 아주 집중하는 편이죠. 스스로 느끼는 거지만 전 일중독 같아요. 주말이 우울하고, 일요일 저녁부터 막 설레기 시작합니다. 월요일에 할 훈련을 주말부터 미리 준비하기도 하고요. 저희 팀 같은 경우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한 달 정도 야간훈련도 하거든요. 그러고 퇴근하면 밤 10시가 되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면 ‘참 정신없이 산다’고 말할 겁니다. 그런데, 전 그런 생활이 행복해요. 선수들을 지도하면서 지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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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이 훈련을 마치고 퇴근한 시간에도 그는 팀 사무실에서 남은 사무를 본다. 오늘 훈련의 분석을 하고 내일 훈련의 준비에 잡무까지. 사무실의 불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감독님에게 선수들은 어떤 존재인가요?
구성은 같은 경우는 제가 부임한 후 지금까지 함께한 제 시작과 현재인 셈이죠. 그런데 구성은 선수가 서운해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게는 5년 된 구성은도 있고, 3년 된 김원경도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다른 선수들도 제게는 한결 같습니다. 물론 두 친구가 우리 팀의 큰 기둥이죠. 그 기둥이 저와 다른 선수들을 든든히 지탱시켜 주는 건 확실해요. 
선수들은 저를 힘들게도 하고,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고, 희노애락을 겪게 하는 존재죠. 그 모든 것이 저를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임 초창기 서로 간에 불만이 쌓였을 때, 선수들과 툭 터놓고 대화를 했었는데요. 그 때 “감독님, 저희는 감독님을 정말 좋은 감독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를 희생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들은 적 있어요. 어감이 어떤 식으로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전 순간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지요. 
대한민국 스포츠 팀 중에서 감독과 선수 사이에 “감독님, 이건 잘못된 것 같아요. 이건 이렇게 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하기 힘들거든요. 물론, 언제나 각자 본연의 위치로 돌아오긴 합니다만, 어떤 때는 제가 엄마한테 꾸중 듣는 자식처럼 되기도 하고요. 선수들이 자식한테 혼나는 부모가 되기도 합니다. 표현이 적당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서로 위하고, 배움이 되는 관계일 때, 자신의 위치는 크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지금은 서로 끈끈한 정이 있고, 서로를 대하는 바탕에 동지애가 배어 있죠. 

나의 원동력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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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일 감독은 자신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건 가족들의 지지와 헌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독님의 가치관, 지도력의 원동력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제가 하는 모든 일의 결정권자는 제가 아니라 아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아내의 내조가 제게 큰 영향을 준다는 것인데요. 사실 제 아내의 내조는 자신을 끝없이 희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마음 아프죠.
언젠가 가족들이랑 맛있는 음식점에 갔어요. “여기 음식 정말 맛있다. 언제 한 번 우리 아이들도 데리고 와야겠어”하고 아내에게 말했는데, 아내가 “당신 아이들 옆에 있잖아. 누굴 데리고 오자는 거야?”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아~ 미안, 선수들······”하고 말했어요. 
이런 일들이 자주 발생해요. 이런 상황이 반복됐을 때, 힘들어하고 울적해하는 아내들이 분명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제 아내는 “으이그~ 하여간 못 말려. 하긴 당신이 그렇게 챙기고, 열정을 쏟으니까. 선수들도 그만큼 하는 거지~”하고 받아줘요.
제가 억대 연봉의 경륜선수였다가 백수, 학생이 됐어요. 그 때도 함께 준비해주고, 지지해준 것이 제 아내였죠. 아내가 성악을 전공했거든요. 제가 4년 간 백수생활을 할 때, 강의에 레슨까지 다니면서도 힘들다 내색한 적이 없어요. 백수생활 중에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게요, 오전 11시에 집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거였어요. 남들이 ‘저 집 남편은 만날 집에 있어~’하고 생각할까 봐요. 그럼에도 단 한 번도 “나가서 돈 좀 벌어 와라, 이제 일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같은 말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당신이 준비하는 이 시간도 과정이야”라며 격려했죠. 
그런 엄마를 닮았는지 우리 아이들도 마음이 너그러워요. 딸이 언젠가 학교에서 글짓기를 했는데요. “아빠가 저희보다 선수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는 가슴이 아픕니다. 그래도 아빠가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아빠는 한국 최고의 사이클팀 감독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썼더라고요. 
아내와 아이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그런 가족들이 지지가 있어 제가 하는 일이 신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 사이클링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위대한 팀 만들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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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은 방송이나 인터뷰 마다 “대구시청 팀은 어떤 팀입니까”라는 질문에 “작지만 강한 팀”이라고 대답했고, “앞으로 어떤 팀을 만들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엔 “큰 팀”이라고 말했다. 

언젠가 감독님께 꿈을 물었더니 “큰 팀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김형일에게 ‘큰 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건가요?
······. 제가 큰 팀이라고만 말한 건 이야기가 길어지기 때문에 중의적인 의미로 말한 겁니다. 
큰 팀이란, 규모가 크거나 대회마다 우승하는 팀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크다는 뜻이 꼭 그런 건만은 아니지요. 다르게 표현하면 ‘바탕이 되는 팀, 계기가 되는 팀’이라는 게 적당하겠네요. 
우리나라 사이클계는 언제부턴가 올림픽 금메달이 목표가 되었습니다. 국가차원에서는 국가대표 선발전을 치르고 국가대표 팀을 꾸려서 올림픽 대비 훈련에 들어갑니다. 올림픽을 1년 정도 앞두고 해외대회도 자주 나가지요. 조금 아는 분들은 이런 방식을 비판합니다. 단편적이고, 장기적이지 못하다고요. 그런데, 다른 나라라고 이런 방식이 다를까요? 아닙니다. 선발기준이나 대표 팀의 운영방식에서 다소 다를 수 있지만 국가단위 차원의 방법은 대동소이해요.  
결정적으로 다른 건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바탕이 다른 거지요. 우리는 한국 내 시즌 경기를 위주로 움직이고, 사이클 강국들은 월드 시즌을 염두에 두고 움직여요. 우리는 전국체전이 시즌 목표지만, 그들은 유러피언 챔피언, 월드컵, 월드챔피언십이 시즌 목표예요. 바탕이 다르지요. 올림픽 금메달을 따려면 세계무대를 기준으로 선수를 선발해야 하잖아요. 

저들과 인종이 다르고 레벨이 다르니 우리 안에서 최선을 다하자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어요. 과연 그럴까요? 독일의 단거리 선수 크리스티나 보겔(2016 UCI 랭킹 경륜 1위, 스프린트 2위) 아시죠? 우리 김원경 선수가 이 친구하고 경기를 하면 지겠죠? 두 번해도 지고, 천 번해도 질 거예요. 그런데 천 번 진 김원경과 한 번도 도전 안 한 김원경이 같을까요? 
한국에선 김원경에게 이혜진 밖에 라이벌이 없어요. 이혜진도 올림픽 준비를 하면서 해외에서 그런 선수들과 많이 부딪히고 성장해서 돌아왔을 거예요. 그런데, 한국에선 김원경만 이기면 쉽게 자기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죠. 김원경도 이혜진만 이기면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겁니다. 이게 최선인가요?
어처구니가 없는 건 말이죠. 지난 시즌 유럽에서 열린 대회에서 크리스티나 보겔이 내놓은 200m 플라잉 기록이 11초2였거든요. 지난 KBS 양양대회 기록을 보면 이혜진이 10초9, 김원경이 11초2, 최슬기가 11초1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라면 이 친구들이 크리스티나 보겔을 이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현실은 크리스티나 보겔과 겨루는 게 연중, 또는 일생의 이벤트가 되어야하는 걸까요? 
제가 말하는 큰 팀은······ 세계의 벽으로 가는 길에 도전하는 팀, 천 번을 부딪치는 팀, 그래서 이정표가 되고, 계기가 돼서 대한민국 사이클링에 이바지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그런 팀이요. 남들이 시스템과 여건을 탓할 때, 우리는 스스로 바꾸고, 나아가고, 부딪히는 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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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변을 듣고 더 많은 궁금증이 생겼지만, 마음이 먹먹하여 더 묻지 않았다.
2017년 7월 7~9일, 대구시청 팀은 재팬 트랙 컵Ⅰ, Ⅱ에 국가대표 자격이 아닌 ‘DAEGU CITY’라는 이름으로 참가했다. 
대구시청의 김원경은 I, Ⅱ 대회 모두 경륜과 스프린트 종목에 출전했으며, 두 종목 모두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보이노바(현 시즌 UCI 스프린트 랭킹 3위)가 김원경의 최대 호적수로 등장했다. 경륜에서는 두 번 모두 김원경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스프린트에서는 두 번 모두 아나스타샤가 우승했다. 스프린트에서 조차 김원경은 두 번 모두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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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청 팀은 2017년 7월, 재팬 트랙 컵 Ⅰ, Ⅱ에 국가대표 자격이 아닌 자체 팀 이름으로 출전했다. 이 두 대회에서 대구시청 김원경은 스프린트 세계 랭킹 3위인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보이노바를 두 번 모두 누르고 경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김형일 감독은 재팬 트랙 컵 원정을 마치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올렸다. 그 중 일부분을 발췌해 올린다.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선수들을 훈련시킨다. 어떻게 훈련을 해야 할까? 어떤 훈련 프로그램이 필요할까? 그런데 어쩌면 정답 중에 제일 효과적인 정답은 내가 항상 찾는 그 곳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다.
- 중략 -
우리는 그 안을 잠깐 체험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느낌이다. 우리 선수들도 그들과 경쟁하면서 수 없이 깨지고, 넘어지고, 지면서, 터득하고, 배우고, 성장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알아가는 것이 오늘 내가 내게 준 큰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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